페르소나
3월 24일 큐티 정지운 목사
마태복음 23장 29-39절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되고 있는 K드라마 가운데 김은숙 작가가 쓴 더 글로리가 화제입니다.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학장 시절 학교폭력을 당한 피해자 주인공이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즌2가 스트리밍 되는 날 드라마를 제작한 PD의 학교폭력 논란이 기사화되었습니다. 학교폭력의 문제의식을 가진 드라마를 제작한 PD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라틴어로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가 벗었다가 하는 가면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왜 이 단어가 떠올랐을까요?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한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을 보면서 페르소나 위선의 가면을 살아가는 인간의 이중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페르소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예수님의 일곱 번째 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면서 자신들의 조상들과 차별화하려고 했습니다.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후손 코스프레 한다고 겉모습만 포장한다고 달라진 건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상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청교도 토마스 아담스는 위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선자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과 같다. 그는 기껏해야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는 가면을 쓴 연기자와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위선의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죄와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죄는 어느새 위선이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70가지 결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8번째 문항에서 모든 면에서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도 나만큼 그렇게 악하지 않은 것처럼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범한 것처럼 행동하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계기로 삼자. 나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기회로 삼자. 57번째 문항에서는 불행과 불운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 내 의무를 다 했는가를 돌아보고 최선을 다하도록 결심하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자. 할 수있는 한 내 의무와 내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항상 작은 죄 하나까지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위선의 죄와 치열하게 싸울 때 우리는 위선의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고 전두환 대통령 손자 전우원 씨가 뉴욕의 자택에서 자기 가문의 죄를 폭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만약 내 죄를 폭로하는 유튜브 방송을 하신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는데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폭로하지 않으시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위선의 가면을 벗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김을 당하시고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위선의 페르소나를 점검하며, 위선의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오늘도 우리에게 회개의 골든타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