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의 뇌피셜

12월 11일 큐티 정지운 목사

욥기 34장 1-30절

최근에 유튜브를 보다 보면 많이 듣게 되는 신조어가 하나 있습니다. 뇌피셜입니다. 뇌피셜이란 ‘뇌’와 ‘공식적인’이란 뜻의 영어 단어 ‘official’이 결합된 신조어로서 자기 혼자만의 생각을 공식적이고 정확한 사실로 믿고 주장 혹은 전파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종범 선수의 아들 이정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포스팅 중인데, 어느 팀에 가게 된다는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게 됩니다. 이것이 뇌피셜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팀으로 정해지게 되면 최종적으로 오피셜이 됩니다.

욥기 32-37장까지는 6장에 걸쳐서 엘리후의 뇌피셜을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32장에서 마치 종결자처럼 행세하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후의 뇌피셜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34장 1-4절을 보면 내 말을 들으며, 내게 귀를 기울이라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우리끼리 알아보자 하는 엘리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엘리후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흑과 백, 선과 악이라는 틀로 이야기하면서 결국 이분법적 사고의 끝에 승자와 패자만 남게 됩니다. 심지어 엘리후는 욥이 악인들과 한패인 것처럼 넘겨짚고 있습니다. 이처럼 엘리후의 뇌피셜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엘리후가 하나님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엘리후는 마치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공의 주권에 대해서 10-12절에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엘리후가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랑이 빠져 있습니다. 결국 남는 것 정죄 뿐입니다. 또 11절에는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과는 다른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인과응보의 프레임에 갇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부모의 죄도 아니고 맹인의 죄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나타내길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공의와 주권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빠지면 정죄만 남습니다.

언젠가 이찬수 목사님께서는 덜 논리적이고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장에 필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벽한 공의와 완벽한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는 영혼들을 품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엘리후는 계속해서 뇌피셜의 끝판을 보여줍니다. 모든 고난이 악인에 대한 심판인 것처럼 말합니다. 욥이 악인이고 그가 처한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고난이 악인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실로암 망대 사건으로 18명이 사고로 죽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겪는 고난이 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암에 걸릴 수 있으며 사업이 부도가 날 수 있고, 자녀가 방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뇌피셜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피셜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엘리후의 뇌피셜처럼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때로는 덜 논리적이더라도 더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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