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저주

5월 30일 큐티 정지운 목사

로마서 2장 17-29절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칩 히스 교수는 ‘스틱(Made to Stick)’이라는 책에서 지식의 저주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지식의 저주란 일단 무언가를 알고 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정보가 저주를 이미 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어렵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지식의 저주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서 사도바울이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유대인이라고 자랑하는 네가! 20절에 보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여기서 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이방인을 말하고, 교사와 선생은 유대인들 자신을 말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지식의 저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들이 왜 지식의 저주에 빠졌을까요?

유대인들은 지식으로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21절 하반절에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지식으로 자신들을 가르치지 않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신전 물건을 도둑질했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종교 호감도 조사를 했습니다. 천주교는 65.4%, 불교는 66.3% 호감도를 나타낸 반면에 기독교는 25%으로 4사람 중 1 사람만 호감을 나타냈습니다. 심각한 것은 19-20세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기독교 호감도가 19%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물질적, 위선적, 이기적, 세속적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마치 언젠가 ‘친절한 금자씨 라는 영화에서 나온 “너나 잘하세요!”라는 대사처럼 세상은 오늘날 기독교를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까? 지식의 저주에 빠져서 나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성경 공부를 더 하지 않아서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가르치지 않아서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지식은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할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외적인 표시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참할례는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참할례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에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가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성경적인 지식을 더 가졌느냐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마음을 변화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종교적 열심과 유대인으로 가졌던 지식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죄인 된 바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께서는 복음이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행해주신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지식의 저주를 끊고 유대인들처럼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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