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고문
5월 25일 큐티 정지운 목사
민수기 35장 22-34절
희망 고문이란 19세기 프랑스 소설가인 빌리에 드 릴라당이 쓴 단편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어떻게 해도 절망적인 결과만이 기다리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 주어진 작은 희망으로 인해 오히려 더 괴롭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희망이 아예 없다면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깔끔히 손을 뗄 수 있을 텐데, 약간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절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도피성 제도가 가지고 있는 희망 고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도피성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자유롭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젊은 대제사장일 때 도피성에 들어가게 되면 대제사장이 죽을 확률은 희박했을 것이고,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희망 고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죽기만을 바라는 하루하루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라는 그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그림자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기다리는 도피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희망 고문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7장 27-28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처럼 먼저 자신의 죄들을 위하고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죄들을 위하여 제사드리는 일을 매일 할 필요가 없으시니, 이는 그가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단번에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연약한 사람들을 대제사장들로 세웠으나 율법 이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아들을 세웠으니, 이분은 영원히 드려지셨느니라”. 아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구약의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율법이라는 한계 속에서 희망 고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도피성 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희망 고문이 아니라 영원 소망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며 희망 고문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안 되면 낙심하고 원하는 것이 되면 기뻐하는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