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제로
11월 20일 큐티 정지운 목사
욥기 15장 17-35절
사이먼 배런 코언이 쓴 분노와 폭력, 사이코패스의 뇌과학이라는 ‘공감 제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제는 공감의 침식은 어떻게 살인마를 낳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이 됩니다. 총 7단계 중 사이코패스는 레벨 제로에 해당하며, 이들은 공감 제로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바스는 사이코패스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레벨 2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물리적인 공격은 충분히 억제할 수 있으나 다만 부적절한 언행으로 끊임없이 실례를 저지른다고 합니다. 사실상 엘리바스의 말을 보면 사이코패스보다는 낫지만 공감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엘리바스의 모습이 공감 제로일까요? 엘리바스는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내가 보이고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욥이 경험한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엘리바스는 일방적으로 욥에게 들으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욥에게 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욥을 배워야 하는 초등학생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욥에 대한 문제 분석에서부터 해결책까지 오늘날로 치면 Chat GPT에 물어본 결과 보고서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엘리바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감 제로입니다. 엘리바스는 자기 자신은 고수이고 욥은 하수인 듯 여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엘리바스의 모습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질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이야기를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그것이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공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공감하며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서 전해주기 때문에 오래갑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공감 제로 엘리바스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우리의 공감 지수를 점검하며 엘리바스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없는지 살펴보길 원합니다. 만약 그러한 모습이 있다면 교정하고 예수님처럼 한 사람 한 사람 공감해 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