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따라오는 발자국이 된다
10월 31일 큐티 정지운 목사
열왕기상 22장 41-53절
우리 인간은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고 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훗날 마지막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다면 롯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그냥 따라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롯에게는 기준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날 롯에게 새로운 기준이 생기자 더이상 아브라함을 따라가지 않게 됩니다. 롯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아닌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여호사밧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아하시야입니다. 여호사밧은 아사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했습니다. 물론 여호사밧에게도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것과 우상숭배 하는 아합과의 화평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평가는 여호사밧은 여호와 보시기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영적인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서 걸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심지어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 하는 자들을 쫓아냈으며, 또한 아하시야가 동업제의를 했으며 경제적인 실리보다는 영적인 부분을 고려해서 아합 왕때처럼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의 발자국을 따라가면서도 어느새 여호사밧 안에 영적인 기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달랐습니다. 우상숭배하는 왕 아합의 발자국을 따라서 걸어갔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겼으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화 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아버지의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저 아버지를 따라서 모방하며 아무런 문제 없이 익숙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자신만의 영적인 기준을 가진, 따라오는 발자국이 된 여호사밧의 인생과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기준 없이 모방함으로써 따라가기만 하는 아하시야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호사밧은 아사의 길로 행하면서도 자신 안에 영적인 기준을 점검하면서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면서 기준을 점검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없었습니다.
어제 열린 더센트 프리칭 컨퍼런스에서 이찬수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고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가셨지만, 이찬수 목사님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내면화하시면서 옥한흠 목사님의 버전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이찬수 목사님의 버전을 만들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은 대형교회 목사로서 새벽을 깨우기 쉽지 않았던 스케줄이었지만 새벽 시간에 하나님과 독대를 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이 영적인지 아닌지 점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발자국도 누군가가 따라오는 발자국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