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그 위에 하나님이계신다
10월 30일 큐티 정지운 목사
열왕기상 22장 29-40절
우리나라 속담 중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기에 자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합 왕은 뛰는 놈이 아니라 나는 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든 왕이었고, 고대 근동의 치열한 국제정세 파악에도 능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아이큐 148 이상이 들어가는 멘사 회원이 될 만 합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머리는 좋았지만 영적인 왕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열왕기상 후반부 내내 우상숭배하는 이세벨에게 컨트롤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뛰는 놈 위의 나는 놈 아합 인생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 왕은 변장을 합니다. 왕복을 벗고 갑옷을 입고 나갑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으라고 합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요?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전제하고 변장을 했고, 갑옷을 입고 여호사밧을 총알받이로 삼았습니다.
아합의 생각대로 전쟁이 시작되자 한 놈만 패자 하면서 아합 왕을 집중공격합니다. 그런데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을 아합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때 여호사밧이 “나 아합 아니에요” 하니까 아람의 지휘관들이 그냥 돌아갑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역대하 18장 3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러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34절에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여기서 무심코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르툼모라는 단어인데, 영어 성경에 보면 Random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화살을 쏜 사람은 아합 왕을 향해서 쏜 것이 아닙니다. 확률로 계산하면 아합이 죽을 확률보다 여호사밧이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아합은 변장을 했고 갑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 명이 넘는 군사들이 싸우는 전쟁터에서 아합의 갑옷 솔기에 그것도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쏜 화살에 맞아 죽을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여호사밧는 하나님께서 도우셨지만 아합 왕의 갑옷 솔기에 화살이 맞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합이 스스로 만든 갑옷은 아합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만든 갑옷은 영원한 안전장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긍휼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합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죽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아합은 이미 세 번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20장에서 한 선지가가 아합의 목숨으로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할 것이며 21장에서 엘리야가 아합의 피를 개가 핥을 것을, 22장 17절은 미가야 선지자가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질 것을 말씀했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지난주 한 주간 내내 부흥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번에 부흥회 강사로 오신 이찬수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참 도전이 되었던 것은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과 독대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항상 무겁게 여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60대 중반을 향해서 나아가는, 치열하게 살기보다는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을 해나가면 될 때에 꿈 너머 꿈을 향해 나아가시는 모습을 보면 왜 하나님께서 그분을 귀하게 쓰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뛰는 놈 위의 나는 놈,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가 만든 갑옷을 벗고 하나님의 긍휼의 갑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무겁게 여기고 수시로 우리의 마음을 교정하며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