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지저스 16주차 2일
욥기 8장은 빌닷이 욥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며, 자녀들이 죽은 것은 죄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며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고 주장합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욥기 8장을 읽으면 복음은 “조건적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회개의 조건 없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빌닷의 말은 옳아 보이나, 그 말이 욥의 상처에는 칼이 됩니다. 복음은 창대함을 약속하기 전에, 먼저 울고 계시는 이의 곁에 앉습니다.
욥기 9장은 욥이 하나님의 크심 앞에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판결할 자가 없도다”라는 절망의 고백 속에, 그는 중보자의 부재를 한탄합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욥기 9장을 읽으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욥이 갈망하던 바로 그분, 우리 대신 하나님 앞에 서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복음은 답답한 신앙의 벽 앞에 놓인 다리입니다.
욥기 10장은 욥은 “나를 지으신 주께서 나를 멸하십니까?”라며 창조주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 묻습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욥기 10장을 읽으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묻고 또 묻는 인류의 대표자이십니다.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은 욥의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창조주는 결코 창조물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질문하는 자 곁에 남아 계십니다.
욥기 11장은 소발이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지혜는 깊고 넓어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이 지금 겪는 고난도 사실은 적게 받은 것이라며 몰아붙입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욥기 11장을 읽으면, 예수님은 정죄의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로 찾아오신 공감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발의 말은 진리에 가까워 보이지만, 사랑이 빠진 진리는 칼날처럼 날카롭습니다. 복음은 고난을 줄이는 공식이 아니라, 고난 속에 함께하는 얼굴입니다.
욥기 12장은 욥이 친구들의 지혜를 비웃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만, 세상의 불공평함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욥기 12장을 읽으면, 예수님도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상을 뒤엎으신 예수님은, 욥처럼 불의에 분노하셨습니다. 복음은 무조건 참으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고통의 현실을 직면하되,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욥기 13장은 욥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며, 친구들의 말은 허탄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라 해도 나는 그를 소망하리라”는 유명한 고백으로 신앙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욥기 13장을 읽으면,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신 분이십니다. 욥의 고백은 십자가 앞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고백하신 예수님의 음성과 겹칩니다. 신앙은 상황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욥기 14장은 욥은 인간의 인생이 짧고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그는 “사람은 꽃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욥기 14장을 읽으면,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대답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욥이 던진 질문을 삶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복음은 절망의 시절에도 부활의 빛을 품고 옵니다. 욥의 대화는 점점 더 인간의 깊은 질문을 드러냅니다. 고통의 본질, 신앙의 의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갈등, 이 모든 것이 욥의 입을 통해 쏟아집니다.
리딩지저스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대화는 결국 예수님 안에서 응답받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나는 자리요, 고통과 부활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고통은 질문의 시작점이지, 믿음의 종착지가 아닙니다.
주여, 정답이 아니라 당신을 더 깊이 만나게 하소서. 고난 중에도 질문을 멈추지 않게 하시고, 그 질문을 들으시는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오늘도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위로를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