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할 것인가?
10월 28일 큐티 정지운 목사
열왕기상 22장 1-14절
목회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루에 장례를 집례하기도 하고 결혼식 주례를 하기도 하고 출산하는 가정을 심방하기도 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환우들을 심방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면 만감이 교차하게 됩니다.
이처럼 다앙한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매 주일 전한다는 것도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진피터슨 목사님이 이야기 한 것처럼 목회자는 한 주간 하나님과 독대를 하면서 대화를 나눈 것을 전해준다고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 목회는 듣고 싶은 말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만 하는 말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합의 전쟁 제안에 대한 여호사밧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북 이스라엘은 아람의 길르앗 라못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기로 합니다. 명분은 있지만 여호사밧은 명분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하자고 아합 왕에게 제안합니다.
그런데 400명의 선지자와 시드기야의 예언 그리고 미가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한쪽은 아합 왕이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가야는 들어야만 하는 말을 합니다. 왜 이러한 상반된 반응이 나올까요?
본문을 묵상 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400명의 선지자와 시드기야의 관심은 아합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고, 미가야는 하나님이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 전달하길 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듣고 싶은 말을 하는 목회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전할 것인가?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주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것들을 정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KCPC 50주년 부흥 강사로 오신 이찬수 목사님을 보면서 기성교회 목회자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특강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새벽마다 하나님과 특별한 독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독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혼의 필터가 매주 새로워져서 한 주간 하나님 앞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함께 들어야만 하는 말씀으로 선포하기 때문에 설교와 청중이라는 간격은 사라지고 설교 시간 자체가 일방적이지 않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로서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하루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새벽마다 하나님과의 독대 시간을 더 늘려갈 것을 다짐합니다. 부디 여러분의 삶도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힘들어하는 영혼들을 세우는,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